김포의 만세운동

김포의 만세운동

최현수 /

2022-03-12

조회수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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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유스코 청소년 문화해설사 최현수입니다.


    오늘은 김포에서의 만세운동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김포에서는 경기도로 두 번째로 많은 인원이 참여했던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김포에서의 만세운동은 장터에서 많이 일어났는데요, 왜 장터에서 많은 만세운동이 일어났을까요?

    먼저 김포는 한양에서 양화나루로 한강을 건넌 후, 김포, 통진을 지나는 길인 강화로가 통과하는 길이였습니다.

    또한, 한강을 사이에 두고 파주, 고양이 마주 보고있어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는 사람과 물건의 이동이 많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군하리장, 양곡장 등에 자연스럽게 큰 시장이 형성이 되었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장터는 많은 사람이 모여도 의심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터에서 많은 만세운동이 진행되었던 것이죠!

    이 중에서 월곶면에서 벌어진 군하리장 만세운동과 양촌면에서 벌어진 오라니장 만세운동이 대표적입니다.

    먼저 군하리장 만세운동은 이경덕 선생이 성태영, 백일환 선생과 함께 계획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입니다.

    1919년 3월 22일 월곶면 군하리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은 태극기를 든 채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했습니다.

    그날 매일신보의 기사에 따르면 군하리에서 400여명이 시위했다고 전했습니다.

    군하리장 만세운동 다음날인 3월 23일에는 양촌면에서 오라니장 만세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양촌면의 만세운동은 오라니 장터에서 같은 날 두 차례 이루어졌습니다.

    오후 2시는 박충서, 박승각 선생 등이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는 격문을 작성해 주민들에게 돌리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후 오후 4시에는 정입섭, 임철모 선생 등이 주도해 사전에 만든 태극기를 들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양촌면의 오라니장 만세운동은 약 4천여명의 군중들이 참여해 김포의 큰 만세운동으로 기록됐습니다.

    위의 만세운동처럼 지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만큼 조직적으로 전개된 김포 3.1운동은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습니다.

    특히 김포의 3.1운동은 농민들의 주도적인 참여로 전개되었습니다.


    또한, 김포는 바다를 본거지로 활동한 일본군이 곡창지대를 목적으로 침탈해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인데요.

    이로 인해 만세운동뿐만 아니라 김포지역에서는 강상봉, 김경운, 신관수 등 여러의병을 배출하는 등 의병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항일의병투쟁과 학교설립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만세운동은 김포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많은 군중들이 참여하여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머릿속에 새겨볼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지금까지 유스코 청소년 문화해설사 최현수였습니다.


    감사합니다.